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1973년 미군 철수 이후의 베트남 === [[무주공산]](無主空山). 미군이 없어도 남베트남의 표면적인 군사력은 굉장히 강력했으나, 그 강력한 군사력의 태반은 작동 불능 상태였고, 쿠데타까지 준비가 되어가는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게 있어서 빈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전양면전술|북베트남은 앞에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뒤에서는 남베트남을 재차 침공할 준비를 했다.]] 소련과 공산권으로부터 [[Mi-8]] 무장헬기, [[BMP-1]] 보병전투차, [[ZSU-23-4 쉴카]] 자주대공포, [[S-125]] 지대공 미사일 등과, 보병장비로 탠덤탄두 장착형 [[RPG-7|RPG-7V]] 대전차 로켓포, [[칼라시니코프 경기관총|RPK]], [[칼라시니코프 기관총|PK]] 경기관총 등의 신무기까지 잔뜩 공급받은 북베트남군은, 침공 준비를 마치고 1975년 1월 시험삼아 푹룽성(福隆省)을 공격하여 점령 한 뒤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미국은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5년에 북베트남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북베트남군은 공여한 미군 무기를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하는 사태까지 갔다.[[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1&num=203852|#]] 훗날 노획된 미군 무기는 북베트남이 역으로 [[중월전쟁]]에서 잘 써먹었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본래 공산주의자로서 군 내에 위장 잠입해 있던 [[F-5]] [[전투기]] 조종사가[* '응우옌탄쭝(Nguyn Thành Trung)'이라는 조종사다.[[http://news.joins.com/article/1403521|#]] 기사에는 구엔이라고 나와있으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응우옌이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남베트남 총통부 청사에 폭탄을 떨구고 북베트남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 및 [[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참모총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든가. 해군의 상당수 역시 남베트남이 멸망하기 직전 [[필리핀]]으로 도망쳤다. 남베트남 해군 함선들은 [[필리핀 해군]]에게 양도되었다. 보병들은 미군을 따라서 싸운 경험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된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쿠데타며 정권싸움에 질렸는지 북베트남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오히려 환영하였다. 1975년 3월 18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 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했고, 남베트남군의 주력 부대가 위치한 동부 해안 지대로 공세를 퍼부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의회에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 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 밖에 지휘 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북베트남군의 대공세에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버렸다. 이 철수 작전의 문제점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그 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 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이 재배치를 틈타서 호찌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북부 해안 지역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1975년 3월 25일 응우옌 왕조의 고도 후에가, 29일에는 중부에 고립된 남베트남군 최대의 기지 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당한다.''' 그리고 후에와 다낭이 함락된 지 고작 며칠 후인 4월 1일 [[꾸이년]]과 [[나짱]] 등 중부 해안 지대까지 함락당하면서 '''남베트남 영토의 60%가 북베트남에게 넘어가 버린다.''' [youtube(4TbWVuYMYa8)] '''이런 상황에서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치 투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